• 최종편집 2024-05-3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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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철수/일러스트/전광섭

 

 

먼 동쪽하늘에 빨간 점 하나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붉은 하늘로 채색되어 오는 것을 본다.

 

지금 이 시간 이전에 일주일을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있다. 고문 중에 가장 괴로운 고문이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라던데...이건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알 수가 없다.

 

정신이 몽롱하고 눈동자는 완전히 풀려서 영혼이 나를 떠나버리고 몸뚱아리만 남아서 움직이는 듯 한 상태라고나 할까. 아직 새벽이지만 모두 철수준비에 바쁘다.

 

먹다 남은 깡통은 땅을 깊게 파고 묻는다. 그리고 배낭을 꾸리고 개인 장비를 남김없이 챙기고 우리들의 집, ‘고무밭기지’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곳도 똑 같은 전쟁터이지만 왜 이렇게도 그리울까.

 

날이 완전히 밝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트럭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탑승하자마자 정신을 잃고 다음날 쯤 되었을까, 내가 누워있는 곳이 연대 의무중대라고 한다. 팔에는 링거주사가 꽂혀있고...또 잠들고 눈뜨고를 거듭했던 시간이다. 근 이틀간을 이렇게 누워서 잠에 빠져있었다. 의무병이 와서 내게 말한다.

 

“전 소위님, 곧 엠블란스로 옮겨서 나트랑 102후송병원으로 가셔야 됩니다.”

 

얼마를 달렸나 싶더니 커다란 콘셑 양철로 지은 막사로 들어섰다.

 

수십 명의 선배장교들이 누워서 책을 읽는 사람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곳이 임시 휴양지 겸 야전병원이다.

 

내가 자리 잡은 침대 옆에는 후에 4성 장군이 된 신말업 대위가 누워 있었다. 그분은 사단 수색중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사에 들어왔었고 자기형님이 나의 고등학교 은사로서 신중균 교장선생님이셨다.

 

세상 참 좁다. 이역만리 전장에서 반가운 고향선배를 뵙다니.

그분 교장선생님은 내가 미술실기대회에서 받아 온 상을 시상해 주셨던 인연으로 남다르게 사랑을 많이 받은 터였었다.

 

나트랑병원 생활이 하루가 지나니까 문득 소대원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소대원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온통 시퍼런 하늘색 환자복차림의 군졸들이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떼 지어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꽃들이다.

 

불현듯 소대원들 생각이 또 치민다.

소대장은 병원침대생활을 하고 있는데 병사들은 정글의 주간정찰과 야간 매복, 생각하면 홈바산은 내려왔지만 여전히 숨바꼭질은 계속되고 있다.

 

“광복아~ 손 씻고 밥 먹어야지.” 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또 들리는 듯하다.

돌아보면 넋 빠진 환자들의 모습만 눈에 띌 따름이다.

 

나도 그 중 한명이다. 따분한 심정을 달래려고 이곳저곳을 산보한다. 특별히 갈 곳도 없지만...

 

저쪽에서 “소대장님”하고 부르는 소리가 난다. 누굴까?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이수철이 절뚝거리며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새벽미명에 헬기로 후송되었던 그를 이곳 병원에서 만나다니.

 

그날 밤 출혈이 심해서 걱정을 했었는데 살아 있다니 너무 반가워서 와락 껴안았다. 벌써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아직 오른쪽 이마에 박힌 파편은 손을 못 대고 있단다. 너무 민감한 부분인 것 같다.

 

“소대장님은 어디에 부상을 입었어요?”

“응 나도 모른다. 딱히 여기다, 저기다 아픈 곳도 없는데 실려 왔을 뿐이다.”

 

그때서야 “내가 왜 여기에 이러고 있어야 하나”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 때부터 담당군의관을 만나기만 하면 “저 좀 빨리 퇴원시켜 주세요.”라고 졸라댄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고 또 날이 지나고...이렇게 보름이 지날 때, 군의관이 시험테스트 용지를 내밀면서 볼펜을 주신다.

 

별거 아닌 문제라 후딱 써내려갔다. 그리고 제출해 드렸다.

 

“음~” 잠시 살피시더니 밖으로 나가신다. 다음날 나를 인솔하는데 거기에는 검정 선글라스에 반팔 티를 걸친 양반이 찦차에 나를 태운다. 어디로 가는 걸까? 뽀얀 먼지를 흩날리며 달린 찦차는 헌병대 정문 안 쪽에서 멈춘다.

 

백마부대 사단헌병대 유치장이다. 군화 끈을 느슨하게 푼 채로 덜덜 끌며 런닝 셔츠차림에 스포츠머리를 짧게 친 나이가 듬직한 사람이 가까이 오더니 “어이 전 소위 이리로 들어 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양철로 지붕을 한 철창이다. 중간에 칸막이가 되어 있는데 한 쪽은 사병들 몇이 들어 가 있다. 나는 독방인데 아마 장교 감빵인 모양이다.

 

“아~이거 어떻게 된 영문이야!”

왜 내가 여기에 잡혀왔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옆 칸의 병사에게 물었다.

 

“방금 날 여기에 집어넣은 저 친구 계급이 뭐지?”

“저거 장기하사인데 저 계급을 7년째 달고 있는 박하사입니다.”

 

생김세도 꼴통 같았는데 아주 사납게 보이는 키가 훤칠한 하사다.

 

“여보, 박하사 나 좀 봅시다.”하고 부르니까 여전히 군화를 덜덜 끌며 가까이 온다.

철창 밖으로 손을 뻗어서 혁띠를 잡고 바짝 당겼다.

 

“뭐 전소위 이리로 들어 가? 야 이 새끼야! 헌병은 원래 장교도 몰라보는 거냐?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반말이”

“어어 이거 놓고 말하세요.”

 

이렇게 왁자지껄 한 와중에 헌병중대장인 듯한 대위 한분이 오더니 날 말린다. 지금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서 속에 천불이 날 지경인데 어데 분풀이 할 곳이 없다. 그 헌병중대장한테 여기에 갇히게 된 연유를 물었다.

 

“백마 1호 작전 때 무슨 사고가 있었다는데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요.”하신다.

“뭘까?” 죽은 ‘파홈타이’가 맘에 걸린다. 때마침 우르르 꽝! 뇌성이 치더니 굵은 빗줄기가 한바탕 양철 지붕을 두들긴다. 마치 기관총 쏘는 소리 같다. 스콜이 한줄기 굵은 물세례를 퍼붓고 저쪽으로 검은 구름이 꼬리를 틀며 사라진다.

 

양철지붕의 시끄러운 게 더위 먹는 거보다는 훨씬 낫다. 곧 이어 갑갑하고 답답한 맘이 또 엄습한다.

 

“도대체 이 꼴이 뭐람?”(다음에 이어집니다)

[국가유공자·베트남참전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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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전광섭의 ‘진주알들의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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