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2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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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바산전투/일러스트 전광섭

 

어느 날 눈알이 부리부리한 교도소 중대장 중위가 날 좀 보자고 한다.

부탁인 즉, 자기 아이가 소풍을 가는데 나의 영치물 중에서 카메라를 빌려 달라는 얘기다.

 

기꺼이 허락을 해서 쓰게 했는데 몇 주일이 지나도록 다시 돌려 줄 생각을 안 하고 있다. 혹시 깜빡했나 싶어서 되돌려 줄 것을 요청했더니 눈알이 휘둥그레지며 아래위를 마구 훑어보더니 대꾸도 않고 가버린다.

 

“이 새끼 봐라, 웃기는 양반이네” 속으로 내뱉었다.

 

그날 이후로 종종 장교숙소 내무반에 워카를 신은 채로 들어와서 정돈 해 놓은 옷들을 뒤집어 엎고 이것저것 행패를 부린다. 중위계급장을 7년째 단채 진급도 안 되고 있는 고참 헌병장교란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던 나의 여친이 방첩대 준위와 찦차를 타고 면회를 왔다.

 

헌병대 내에서는 비상 아닌 비상이 걸린 양 시끌벅적하다. 일반면회소가 아닌 소장실을 비워주며 음료수를 갖다 주는 등 번잡을 떤다.

 

여자 친구는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에 가정교사를 해 주었던 이웃이다.

 

자초지종 얘기 중에 곧 빠른 시일 안에 재판에 회부되기로 부탁을 해 놓았단다. 그때 다시 상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그의 고모부가 김종필과 육사 동기로서 중앙정보부 마산 지부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다음날 골통 헌병중대장은 사병을 시켜 카메라를 돌려주었다.

 

얼마 후 용산구 후암동에 자리한 국방부 청사에서 고등군법회의가 진행되었다. 여친은 또 상경해서 뒷자리에 앉아 방청 중이다.

 

“.....피고 전광섭 소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얘기해라.”

재판장 대령이 눈짓한다.

 

“자유우방국을 돕자는 국가의 부름에 파병되었다가 이렇게 불명예스런 귀국을 하게 되어 퍽 송구한 마음입니다. 제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무얼 잘못했는지에 대한 반성은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건 죽은 ‘파홈타이’가 처음 체포했을 때 초췌한 모습대로 평소 지병으로 쇼크로 갔는지, 또는 그날 밤 도주하다가 넘어져 앞이마가 다쳤었는데 그로 인한 뇌진탕인지, 아니면 우리병사들의 구타로 죽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쪼록 선처해 주시면 저의 짧은 실전경험이지만 군(軍) 발전에 기여토록 하겠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재판관들은 바쁘게 서류를 뒤척이더니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파홈타이’의 죽음에 대해서 그 어느 곳에도 사인을 명시한 곳이 없다. 따라서 피고 전광섭은 벌금 1만2천원(1만5천원 아님)에 처한다....”

 

그 날 저녁 남한산성교도소에서 보관물품을 모두 챙기고 난 후 업무가 종료된 시간임에도 나를 석방시켜준다.

 

곧장 서울역으로 가서 늦은 시간 부산행 입석열차를 탄다. 이 칸 저 칸 두 리 번 거리다가 화물칸에서 쌀가마니를 배게 삼아 밤새 10시간 넘도록 흔들거리며 가고 있다. 깊은 잠을 깨우지 않고 자기는 뜬 눈으로 내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는 곳 마다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신 걸 뒤늦게야 깨닫게 된다.

 

남지나해의 산더미 같은 파도에도 수송선을 지켜주셨고, ‘홈바’산 계곡의 수많은 독충과 말라리아를 멀리해 주신 일, 무엇보다 적의 기습총탄에 피할 바위그늘을 예비해 주셨고...

 

50년 후인 2016년 12월5일 홈바산 전투의 가장 기억에 남는 전우 3명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

또한 이들로부터 한명의 전사자가 없었다는 소식을 듣게 해 주시다니...

 

신자가 되기 전에는 내가 잘 나서 모든 일이 잘 풀려난 양, 우쭐대던 이 죄인이 그나마 뒤늦게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의 우편에서 지켜주심을 두 손 모아 감사드린다.

 

몇 날 동안 외출 않고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데 육군본부인사 참모부에서 한번 방문해 달라는 서신이 왔다. 바로 다음날 상경해서 담당군무원 준위를 만났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재복무를 할 수 있도록 발령을 낼 수 있다며 나의 의중을 묻는다. 이토록 젊은 장교를 기력을 상실케 해놓고 다시 복무하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서글픈 생각만이 떠올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는 이 길로 전역했으면 합니다.”

나와 상담하던 그 군무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저의 생각도 그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한번 불미스런 기록이 있으니까 앞으로 진급심사에서도 매번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때의 심정은 모든 게 귀찮고 세상을 등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 젊은 청춘이 의기충천하여 머나먼 정글에서 신물 나도록 숨바꼭질을 하다가 결국엔 허무한, 너무도 허황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젊은이.

 

이 젊은이가 어찌 내 한 몸뿐이랴 마는 이 한을 품은 체 여생을 마감하기엔 너무 가슴이 막힌 듯해서 그날의 기억을 되 살려본다.

 

이글을 읽고 주변 친구들이 나에 대한 과거사를 조금이라도 이해 해 준 듯해서 다행이다.

 

베트남참전의 얘기가 나온 김에 과연 그 때의 우리목숨 값은 얼마나 되는지 한번 기록해 보고자 한다.

 

국가와 젊은 피 값의 계약이 없었을 뿐 엄연한 사실에 대한 위정자들의 양심에 노크해 본다.

 

1967년 말. 나의 전령 허은 병장이 무사히 월남전의 복무를 마치고 귀국했다.

 

출국 전 서울 안암동 이모님께 꾼 돈을 갚으러 찾아 뵐 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25만여 원이 있었단다.

이모님은 이 돈으로 마침 35평 정도의 단독주택이 있는데 이걸 사 두라는 재테크 조언을 했었단다.

 

지금 그 지역은 전철 등 기타 대중교통수단이 너무 좋은 동네로 자리 잡고 있어서인지 적어도 10억은 족히 웃도는 곳이다.

 

이처럼 특수한 지역이 아니더라도 그때의 화폐가치는 지금과 비교가 쉽지 않을 뿐이다.

바로 귀국직전 월남 전장에서 환율이 750:1이었다.

 

허 은 병장의 현지수령액은 월(月)53불, 그리고 나머지 금액 300불은 매월국고로 떼어 들어갔다. 300불×750원=225000원...매월 국고로 들어간 목숨수당이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로서 뜻과 생각이 있는 국가의 지도자라면 환산해 보기 바란다.

 

필자는 지금생존 인원 17만 명으로 계산해 보면 5천만 원씩 지급하려고 해도 너무 큰 재정을 필요로 하기에 국민 세금으로는 후진들의 원망을 살 뿐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 시절. 우리들의 피 값으로 특혜를 가장 많이 누려 승승장구해 온 대그룹의 기업들 몫으로 사회 환원 차원에서 애국심을 발휘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고속도로, 포항제철...등등의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부국의 토대를 기억해 주길 바란다.

무엇보다 국가의 지도자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유야무야 넘어 갈 뿐이다.

 

파월장병 생존자는 대략 17여만 명이지만 매년 5000여 명씩 한을 해소하지 못한 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이들은 거의가 칠십대 후반에 접어든 힘없는 노인들이다.

 

그 후에 중동모래밭의 땀 흘렸던 역 꾼들이 벌어 온 돈으로 국내는 특수경제를 누렸지만 그들의 땀 값을 국가에서 가로 채지는 않았다. 독일광부도 마찬가지였다.

 

책에서 손을 놓은 지가 5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 글쓰기에는 너무 부족한 자신이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여기에 몇 자 기억을 남긴다.…다음에 이어 집니다

[전광섭·국가유공자·베트남참전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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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전광섭의‘진주알들의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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