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以前) 그리고 이후(以後)
월남전투에 뛰어들기 전 나의 소년시절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건 개인의 성장기이자 우리의 그 시절 한 토막 역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릴 때는 가난이 그렇게도 부끄러운 일상이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인생의 단련기간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깨달음이 쌓여있다. 지긋지긋한 그 시절을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그래도 티끌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서 생각을 파고든다.
나는1943년 1월에 일본 '오사카' 외곽지역의 '미스다마루'란 곳에서 출생했다. 당시 폭격을 피해 피난 갔던 시기에 태어났었다.
열여덟 살, 젊은 나이에 일본으로 돈벌이하러 고향 경북 상주에서 무작정 동해를 건너가셨던 아버님이시다.
위로는 세분의 형님들이 계셨고 내가 네 번째 막내일 때 세 살배기로 8.15광복절을 맞아서 연락선을 타고 귀환동포가 된 셈이다. 아버지는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돈을 가졌단다.
배 2척을 대절해서 한 배에는 당시 한국에 부스럼 병이 유행이라고 고약을 가득 싣고, 또 한배에는 우리가족이 먹을 식량과 함께 타고 현해탄을 건너오는 중이다.
일본에서 번 돈으로 그 전쟁 와중에 새 집을 장만하시고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던 중이라 어머니는 그냥 고국에 나가지 말고 그 자리서 일본인이 되어 살자고 하셨는데 해방 후의 아버님은 조국광복이 그토록 바라던 소망이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집안의 삼대독자로 일가친척이라고는 삼천포 처가집안의 식구들뿐이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출발 전에 외할아버지 편으로 많은 돈을 줘서 논밭도 사고 새로운 생횔터전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다.
그때 ‘시모노새끼’에서 출발한 연락선은 일주일정도면 삼천포에 도착하는데 고약을 실은 배는 제대로 왔는데 가족이 탄 배는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가 한 달 만에 닿았단다.
삼천포 외갓집에서는 기다리다 못해 제주도 해적들한테 잡혀서 사고가 난 걸로 판단해서 외할아버지의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고 많은 돈을 이웃들에게 마구 빚 놓아 줘버렸던 사고를 저지르고 만다.
그때만 해도 피폐한 국내 생활을 겪던 사람들은 귀한동포의 재물은 먼저 보는 게 임자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라니 늦게 도착한 아버님을 반가워하면서도 돈은 모두 빌려 줘버리고 고약만 남아있는 광경이다. 아버지로서는 이때부터 고생길에 들어서신 계기가 되고 만다.
이제 남은 건 고약뿐. 장인은 차용증서도 한장 받아 놓은 게 없는 어리석음의 어른이다.… 다음에 이어집니다
[국가유공자·베트남참전 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