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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보다 강한 눈빛' '세기의 미남' 알랭 들롱 잠들다
- [이코노미서울=연예팀] “저는 특별했어요. 요즘 배우는 상상도 못 하겠지. 내가 살았던 것과 비슷한 삶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은퇴하는데 전혀 후회가 없어요.”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잘생겼던 것 같아요. 여자들은 내게 사로잡혔어요. 내가 열여덟 살 때부터 쉰 살 때까지.” 알랭 들롱은 지난 2017년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의 직설 화법은 은퇴한 적이 없다. ‘프랑스 영화의 수수께끼 같은 천사’로 불렸던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이 18일 프랑스 두시(Douchy)에서 89세로 별세했다. 그의 세 자녀는 이날 “알랭 들롱이 나빠진 건강과 사투를 벌이다 자택에서 가족과 루보(반려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50년대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 황금기를 이끈 대중 스타로 ‘태양은 가득히’ ‘암흑가의 두 사람’ ‘한밤의 암살자’ ‘볼사리노’ 등 영화 90편에 출연하며 전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영화학자 데이비드 톰슨은 알랭 들롱을 두고 “프랑스 영화의 수수께끼 같은 천사, 1967년에 겨우 서른두 살이었고, 어쩌면 여성적이었다. 하지만 치명적이거나 강력하다고 생각할 만큼 진지하고 깨끗했다. 들롱은 훌륭한 배우라기보다 ‘놀라운 존재감’ 그 자체”라고 했다. 미남 배우를 넘어 ‘놀라운 존재감’ 1935년 알랭 파비앵 모리스 마르셀 들롱(본명)으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파리 외곽 소(Sceaux)에서 태어났으나 부모 이혼으로 네 살 때부터 위탁 가정에서 자라다 재혼한 어머니와도 살았다. 가출, 7번의 퇴학, 정육점 직원 등을 거쳐 17세에 입대, 베트남 사이공 해군 기지에서 복무하다 군 차량을 훔친 죄로 불명예 제대했다. 전역 후에는 파리의 도매시장인 레 알(Les Halles)에서 잡부로 일했고, 카페 종업원, 비서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프랑스 여배우와 만나며 칸 영화제를 방문했다가 할리우드의 가장 유명한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눈에 들었다. 제작자가 영어를 배우라고 했지만, 그는 계약을 파기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할리우드 영화에 그다지 많이 출연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다. 1957년 데뷔작 ‘여자가 다가올 때’ 이후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0년 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로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태양은 가득히’와 비슷한 삶 관객들에게 이 미남 배우는 ‘톰 리플리’의 현실판처럼 인식됐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가 원작인 ‘태양은 가득히’는 부자 청년 디키 그린리프를 살해한 리플리의 이야기다. 거짓을 사실로 믿고 싶어하는 ‘리플리 증후군’의 그 리플리를 충실히 연기했다. 관객은 거짓말하는 살인자에게서 슬픔을 봤다. 방탕하고 천진난만한 부자를 경멸하며 동시에 동경하는 가난한 자의 슬픔. 작가 필리프 라브로는 들롱을 두고 “그는 기쁨보다 슬픔에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감독은 들롱에게 디키 역할을 제안했지만, 그는 리플리를 고집했다. 세계적 흥행은 한국도 비켜 가지 않았다. 영어권 제목인 ‘보랏빛 오후(Purple Noon)’ 대신 프랑스 제목을 충실히 의역한 ‘태양은 가득히(太陽がいっぱい)’를 그대로 쓴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미남 배우에게 ‘한국의 아랑 드롱’이라는 수식을 바치는 것도 이때 생긴 전통이다. 첫 영광은 당연히 배우 신성일이 가져갔다. 1967년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한밤의 암살자(Le Samourai)’에 트렌치 코트를 입은 ‘사고하는 범죄자’로 선풍을 일으켰다. 그가 가장 사랑한 장르는 ‘필름 누아르(범죄 영화)’. 1973년 작 ‘암흑가의 두 사람’은 결국 교수형당하는 범죄자 알랭 들롱과 그를 감싸는 보호감찰관 장 가뱅의 연기 호흡이 호평을 받았다. 들롱은 장 가뱅과 연기할 때 가장 빛났다. “범죄자들, 배우가 되기 전부터 내 친구였다” 실제로 범죄자와의 친분도 감추지 않았다. 그의 과거 보디가드가 총을 맞은 채 가방에 담겨 쓰레기장에서 발견되며 프랑스 사회는 알랭 들롱이 조연으로 나오는 ‘현실 범죄 드라마’를 보게 됐다. 들롱의 친구가 살인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내가 아는 갱스터 대부분은 배우가 되기 전부터 내 친구였다. 그들이 뭘하건 신경쓰지 않는다. 각자 자기 행동에 책임지면 된다.” 우익 정당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과 오랜 친구로 진보 노선을 거침없이 비판해 왔다. 특히 사형제 폐지와 동성 결혼 허용을 비판했다. 2019년 칸 영화제가 그에게 ‘명예 황금종려상’을 준다고 하자, 진보 진영은 강하게 반발했다. ‘세기의 미남’도 자연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스위스에서 요양을 해왔다. 그의 아들은 “스위스에 거주하는 아버지는 상황이 닥치면 주저하지 않고 안락사를 택할 것”이라 말했다. 수많은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여성은 영화 ‘크리스틴’(1958)에 함께 출연한 독일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1938~1982)였다. 잡지 기자와 인터뷰하며 자살로 사망한 그녀를 떠올리면서 과거의 편지 문장을 꺼냈다. “비스콘티 감독은 우리가 서로 닮았다고 했었어. 분노, 두려움, 불안의 순간에 둘 다 미간에 V 자가 그려진다나. 렘브란트 자화상에 그려진 ‘렘브란트의 V’라고 하네. 하지만 지금 잠든 당신을 보면, ‘렘브란트의 V’는 사라졌어.” 이제는 그의 얼굴에서도 ‘렘브란트의 V’가 지워지고, 편안한 얼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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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보다 강한 눈빛' '세기의 미남' 알랭 들롱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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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양 측 "구제역, 협박·공갈 있어서 고소한 것"
- [이코노미서울=연예팀] 유튜버 쯔양 측이 구제역의 이중스파이 주장에 대해 "사실관계와 많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쯔양 법률대리인 김태연 변호사는 1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 전화 인터뷰에서 "쯔양은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다. 연락이 어려울 정도로 일상 생활을 거의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밝혔다. 쯔양의 사생활을 빌미로 협박해 금품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는 유튜버 구제역은 지난 15일 중앙지검에 자진 출석해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당시 구제역은 "나는 쯔양에게 공갈 협박을 한 사실이 없다"며 오히려 쯔양 소속사의 요청으로 다른 유튜버들의 폭로를 막은 이중 스파이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태연 변호사는 "진술한 사실관계와는 많이 다르다"며 "우리가 고소에 이르른 건 협박이나 공갈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 밝혔다. 이어 김 변호사는 렉카 유튜버들의 금전 요구 및 협박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쯔양 측에서 다른 유튜버들을 막아달라고 (구제역에게) 요구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싶다. 우리 입장과는 완벽히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 또 구제역을 고소한 것과 달리 카라큘라를 고소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카라큘라가 직접적으로 쯔양 측에 연락온 적 없다는 게 확인이 돼서 (고소인 명단에서) 제외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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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양 측 "구제역, 협박·공갈 있어서 고소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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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현철, 생전 마지막 손 편지...모두 울고 있다 (전문)
- [이코노미서울=연예팀] 트로트 계의 큰 별이 졌다. 가수 현철이 우리 곁을 떠난 가운데, 생전 마지막으로 전한 손 편지가 다시금 눈길을 끌며 우리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다. ‘봉선화 연정’, ‘싫다 싫어’ ‘내 마음 별과같이’등의 유행가를 남긴 가수 현철이 지난 15일 밤 별세했다. 고인은 1969년 ‘무정한 그대’로 데뷔했으며 1982년 발표한 ‘앉으나 서나 당신생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됐다. 수년 전 경추 디스크 수술을 받은 현철은 이후 신경 손상으로 건강이 악화해 오랜 기간 투병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KBS '가요무대'에 출연 당시 무대 위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20년 방송된 KBS2 ‘불후의 명곡’에 하춘화와 함께 레전드 가수로 출연한 것이 고인이 마지막 방송활동이 됐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현철 가요제가 진행됐는데, 당시 현철이 손 편지로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편지가 됐다. 후배 가수 진해성, 최수호, 박구윤, 송도현 등이 현철의 명곡으로 대결을 펼친 것을 두고 현철은 “함께하지 못해 너무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라며 “잊혀져가는 현철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정말 행복하고, 사랑한다”고 전했다. 누리꾼들은 현철 별세 관련 영상 댓글 창을 통해 애도의 뜻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가수 현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요계 큰 별이 졌네요… 진짜 너무 좋아했던 분인데…”,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편히 쉬시길 기도합니다.” 댓글을 달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1969년 '무정한 그대'로 데뷔했으나 오랜 무명 생활을 보냈다. 1980년대 들어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등으로 주목을 받았고 1988년 '봉선화 연정'으로 인기 가수 반열에 올렸다. 현철은 '봉선화 연정'으로 1989년 KBS '가요대상' 대상을 수상한데 이어 이듬해인 1990년 '싫다 싫어'의 히트로 2년 연속 대상을 안으며 트로트 거장으로 사랑받아 왔다. 현철 손 편지 전문. 자식 같은 후배들이 '현철 가요제'에서 한바탕 놀아준다니 가슴이 벅차다. 아름다운 무대에 함께하지 못해 너무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다. 잊혀져가는 현철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많이많이 사랑하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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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현철, 생전 마지막 손 편지...모두 울고 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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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힘 날 때까지 부를 것”… 나훈아 은퇴 선언에 ‘라이벌’ 남진 반응
- “저는 힘이 날 때까지, 내가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불러보고 싶습니다.” [이코노미서울=연예팀] 가수 남진이 1970년대 라이벌 구도를 이뤘던 나훈아의 은퇴 선언을 접하고 보인 반응이다. 남진은 나훈아의 은퇴가 아쉽다면서도 할 수 있을 때까지 가수 활동을 이어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남진은 30일 공개된 MBN 인터뷰에서 “(나훈아가) 빨리 은퇴한다는 얘기를 들었더니 좀 아쉽기도 하다”며 “저는 힘이 날 때까지, 내가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불러보고 싶다”고 했다. 남진은 지난 4일 배우 김승우가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에 출연했을 때도 인터뷰 중 나훈아의 은퇴를 언급하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남진은 “난 믿어지지 않는다. 한창 노래할 나이인데 내가 그 나이면 좋겠다”며 “(은퇴 소식을) 매스컴에서 봤는데 ‘뭐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이라고 했다. 이 방송에서 남진은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이뤘던 1970년대를 추억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두 사람의 라이벌전은 한국 가요사에 다시 없을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목포 출신의 남진과 부산 출신의 나훈아는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를 대표하며 음악 팬들을 모았다. 이와 관련해 남진은 “나훈아씨와 라이벌로 그 시대를 이뤘다는 게 큰 힘이 됐다”며 “이런 명콤비가 또 없다”고 했다. 이어 “우리 같은 양자구도는 없었다”며 “노래 스타일과 분위기도 다르지, 또 출신 지역도 완전히 달라서 더 뜨거웠다”고 했다. ‘개인적으로도 소통을 하는 편이냐’는 질문에는 “친구였으면 술도 먹고 했을텐데 나이 차이가 있다. 내 친구 제자였다”고 답했다. 남진은 “나훈아를 1968년도에 처음 봤다. 서울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음악 학원 차리고 제자 양성하고 있다면서 제자 하나를 부르더라. 근데 그 사람이 나훈아였다”고 회상했다. 앞서 나훈아는 지난 2월 가요계 은퇴를 시사한 데 이어, 지난 27일 인천 연수구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전국 투어 콘서트 첫 날 은퇴를 확정 지었다. 데뷔 58년만이었다. 이날 공연 초반부터 나훈아는 “우선 인천 공연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은퇴’의 말을 입에 담았다. 가수로는 은퇴하지만, 작곡가로는 활동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 추측에 대해서는 “혹시 누구에게 곡이라도 써주며 연예계에 기웃기웃 하지 않을까 싶겠지만, 전 (애초에) 후배 가수들도 잘 모르기에 누구에게 가사나 곡을 주지 않는다”며 “살짝 옆 눈으로도 연예계 쪽으로는 안 쳐다볼 거다”고 선을 그었다. 또 일각에서 제기한 ‘건강이상설’에 대해서는 “금년 2월 스물 다섯 가지 피검사를 했다. (너무 건강해) 의사 선생이 깜짝 놀랐다”고 반박했다. 공연 전 편지에 ‘은퇴’를 직접 안 쓴 것은 “싫어서 안 썼다”고 했다. “꼭 밀려가는 느낌이라서. 전 아직 더 할 수 있다. 그래서 (미리) 마이크를 내려놓는다”고 했다. 그는 “(유튜브에서) 어떤 점쟁이는 내년에 내가 죽는다, 아픈 게 보인다더라. 금년 2월달에 스물다섯 가지 검사를 했다. (너무 건강해) 의사 선생이 깜짝 놀랐다”며 자신의 건강검진표를 무대 위 전광판에 띄우기도 했다.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지”는 이렇게 말해 긴 박수를 받았다. “안 가본 데 가볼기다. 안 묵어본 거 묵어불 끄다. 안 봐본 거 볼 끄다. 제 다리가 멀쩡할 때 저 하고 싶은 거 할 낍니다. 여러분, 하고 싶은 거 하고 사셔야 합니더. 쌔가 빠지게 벌은 돈 다 쓰고 죽어야 됩니더!” 신비주의를 고수해 온 그답지 않게 솔직한 사생활 언급도 이어졌다. 곡 ‘마이웨이’ 도중 “언론에서 제가 세 번 결혼했니, 네 번 했니 하는데. 농담 아니고 전 결혼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며 가사의 ‘Oh No, Oh No’를 능청스레 이어 불러 객석 웃음보를 터트렸다. 그는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이 노래가 제 인생과 비슷하다”고 했다. 평론가 사이 의견이 분분했던 자신의 공식 프로필(1947년생, 1966년 데뷔)의 일부도 바로잡았다. 살이 비치는 핑크색 상의, 찢어진 청바지 등 총 15벌을 곡 사이사이 무대 위 가림막을 두고 갈아입었는데, 대부분 옷에 ‘1967년~2024년’이 새겨져 있었다. 곡 ‘고향역’ 땐 1967년 출발해 2024년 멈추는 기차 영상을 틀었다. 자신이 여기는 가수 출발점을 ‘1967′년으로 암시한 것. 나훈아는 공연 도중 역대 대통령 사진들과 함께 “11명 대통령이 바뀌고도 전 아직 노래 중”이라며 길었던 가수 생활을 돌아보기도 했다. 나훈아의 대표곡 ‘공’의 무대도 이날은 더 묵직했다. 그는 공연마다 이 노래 후렴구 ‘띠리~띠리띠리 띠리~’에 맞춰 만담처럼 속내를 터놓기로 유명하다. 이날도 “이 이야기는 꼭 하고 (노래를) 그만둬야겠다”며 공의 선율에 맞춰 “전 북쪽을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긴 이상한 집단이지 나라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북쪽 김정은이라는 돼지는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말거나 살이 쪄 가지고. 저거는 나라가 아니다. (김정은) 혼자 다 결정하니깐, 실컷 얘기하고 조약을 맺어도 혼자 싫다 하면 끝이다”라며 비판을 쏟아냈다. “이제 전쟁도 돈이 필요한 시대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미사일을 막는 데 하루 1조를 써서 99%를 막았다고 한다. (북쪽에서) 치고 싶어도 칠 수 없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 힘이 있어야 평화도 있다”는 그의 호소에 ‘옳소!’ ‘그렇지!’ 관객 호응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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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힘 날 때까지 부를 것”… 나훈아 은퇴 선언에 ‘라이벌’ 남진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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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남일우 별세…김용림 남편상·남성진 부친상·김지영 시부상
- [이코노미서울=연예팀] 원로 배우 남일우가 향년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1일 소속사 매니지먼트 율에 측은 남일우가 이날 새벽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전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현재 배우이자 아내 김용림과 아들 남성진, 며느리 김지영 등이 빈소를 준비 중이다. 발인과 장지 등은 장례 일정이 구체화되는 대로 정해질 전망이다. 고인은 지난 1938년 5월 태어나 1958년 KBS 성우극회 3기 성우로 발탁되면서 방송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배우로 전향했고 1964년 KBS 탤런트 공채 4기로 안방에 진출했다. 드라마 ‘순애’ ‘내 마음 별과 같이’ ‘이차돈’ ‘제2공화국’ ‘코리아게이트’ ‘용의 눈물’ ‘명성황후’ ‘야인시대’ 등 걸출한 작품들에 출연하면서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 1965년 동료 배우 김용림과 결혼했고, 슬하에 1남 1녀를 뒀다. 아들 남성진 역시 남일우의 뒤를 이어 배우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 2004년에는 동료 배우 김지영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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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남일우 별세…김용림 남편상·남성진 부친상·김지영 시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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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상 진행자 “감옥 갈때 지나지 않았나”…트럼프 조롱 논란
- 토크쇼 진행자 키멀, 자타 공인 리버럴 인사 [이코노미서울=연예팀] 10일 치러진 아카데미(오스카상) 시상식에서 방송인 지미 키멀(Jimmy Kimmel)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해 “감옥 갈 때가 지나지 않았냐”고 공개 조롱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이 영화제에서 정치인을 향한 저격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키멀 스스로가 “제작진 만류에도 내가 한 것”이라 밝혔기 때문이다. 키멀 발언이 ‘사이다’라는 찬성 측과 영화제에서까지 꼭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야하냐는 반대 측 의견이 엇갈리며 오스카상을 놓고 미국 사회의 진보·보수가 또 다시 갈라진 모습이다. “연예인들의 ‘개념 코스프레’ 속 오스카상이 엉망진창이 됐다”는 얘기도 나왔다. 인기 토크쇼 진행자인 키멀은 과거 민주당 의원들의 펀드레이징(선거자금 모금) 행사에 참여해왔고, 트럼프 정부에선 대통령과 측근들을 줄곧 비판해온 인사다. 과거 “토크쇼 호스트가 진보적(liberal)인 이유는 이 일이 지능을 요구하기 때문”이라며 자신에 대한 편파 논란을 받아치기도 했다. 이런 키멀의 정치 패러디 영상을 민주당 지지자들은 ‘사이다’라며 돌려봤다. 키멀은 올해 통산 네 번째로 시상식 진행을 맡았는데, 이날도 공화당 정치인을 저격하는 것으로 포문을 열었다. 영화 ‘가여운 것들’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에마 스톤을 소개하며 “에마는 (조 바이든 대통령의) 국정 연설에 반박 연설을 한 여성처럼 어린아이 뇌를 가진 성인 여성을 연기했다”고 했다. 이는 지난 7일 바이든 국정연설에 대한 반박 연설에 나섰다가 어색한 톤과 과장된 감정의 연설로 비판 받은 공화당 최연소 상원의원인 케이티 브릿을 지적한 것이다. 키멀의 이같은 발언에 TV를 보고 있던 트럼프가 발끈했다.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글을 올려 “역대 오스카에서 키멀보다 최악인 진행자가 있었나” “그의 오프닝은 결코 될 수 없는 무언가 되려고 노력하는 평균 이하 사람의 멘트였다” “키멀을 치우라” “오늘 밤 정말 나쁜 쇼였고, 연결이 안 되고, 지루하고, 아주 불공정하다”고 했다. 여기에 키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시상식 말미에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트럼프가 쓴 글을 낭독했다.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아직 깨어 있다니 놀랍네요. 감옥에 갈 시간이 지나지 않았나요?” 형사 기소돼 여러 재판을 받고 있는 트럼프 상태를 꼬집은 것이다. 키멀은 “(제작진이) ‘아니, 아니 그것을 읽지 말라’고 했고, 나는 ‘트럼프 트윗을 읽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진 만류에도 강행했다는 뜻이다. 키멀의 트럼프 저격에 객석에 앉아있던 영화 ‘바비’의 주연 배우 마고 로비 등 많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안 그래도 대선을 앞두고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SNS는 곧바로 전쟁터가 돼 버렸다. “대단한 오스카, 미국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게 아니라 쪼개 놓고 있다” “그냥 솔직히 너무 재미가 없다” “공화당 사람들이 저랬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저런 사람이 이런 ‘쓰레기’ 같은 시상식으로부터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같은 부정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트럼프 측근인 리처드 그레넬 전 독일대사는 “트럼프가 오스카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해줘 고맙다”고 비꼰 반면, 반(反)트럼프 인사인 조지 콘웨이는 “엽기적인 행동을 문제 삼고 비웃는 게 트럼프를 다루는 방법”이라고 키멀을 두둔했다. 미국의 공식 석상에서 배우나 코미디언이 정치인을 조롱·풍자하는 ‘정치 패러디’를 하는 건 흔한 일이다. 백악관출입기자단(WHCA) 만찬에선 대통령이 온몸으로 자신에 대한 비판을 받아내고 개그맨까지 섭외해 ‘자학 개그’도 선보인다. 하지만 보수 유권자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PC)나 이른바 ‘워크(Woke·인종, 성별,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깨어 있다는 의미)’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이를 대하는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2020년 영국 코미디언인 릭키 제바이스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통해 정치·사회 현안에 대해 말하는 일부 배우들을 향해 “당신들은 실제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어떤 것도 강연할 위치에 있지 않다”며 “만약 수상 한다면 올라와 상을 받고, 에이전트와 신(神)에 감사드리고 꺼져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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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상 진행자 “감옥 갈때 지나지 않았나”…트럼프 조롱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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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희 “미8군 데뷔 무대서 난생 첫 기립박수… 노래 인생 ‘꽃밭’ 열렸죠”
- [한미 동맹 70년, 번영을 위한 동맹] 정훈희 “미8군 경험이 날 키워” 가수 정훈희(72)의 노래 인생은 미군에서 듣고 배운 음악이 바탕이 됐다. 아버지(정근수), 작은아버지(정근도), 오빠(정희택)가 모두 미 8군 무대에서 음악 활동을 했다. 남편(김태화)도 미 8군에서 록밴드 리드 보컬로 활동했다. 미8군(Eighth United States Army)은 미 육군 야전군의 하나로 한국에 주둔한 주한 미군 지상군을 말한다. 다음은 조선일보 보도. 아버지는 1950년대 후반 부산에 주둔한 미군 부대(캠프 하이얼리아·Camp Hialeah)에서 피아노를 쳤다. 해방 이전 최대 음반사인 빅터 레코드 전속 가수였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늘 말했다. “이제는 미국 노래를 불러야 해. 더 큰 세상에서 놀아야 한다.” 한글을 깨칠 무렵 아버지는 딸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대여섯 살 때쯤이었을까? 아버지가 ‘ㄱ’을 써주시면서 ‘이게 기역인데, 기역의 영어 발음은 ‘G’라고 쓴다. 알겠제?’ 이런 식으로 한글과 알파벳을 동시에 배웠어요.” 어린 정훈희도 미국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뛰었다. AFKN(주한미군방송·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팝송을 익혔다. “AFKN 라디오에서 최신 미국 인기 가요 방송인 ‘아메리칸 톱 포티(American Top 40)’가 들리면 그렇게 마음이 설레는 거예요. 최신 팝송이 들리는 대로 우리말로 받아 적으며 따라 불렀어요. 아버지가 미군 부대 미국인들한테 원어 가사를 받아주시기도 했고요. 너무 재미있고 신기하니까, 영어로 말하고 쓰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어요.” 작은아버지는 미 8군에서 활약한 밴드 마스터였다. 1967년 고교 1년생인 16세 정훈희가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던 건 작은아버지 덕분이었다. “작은아버지는 서울 대형 나이트 클럽에서도 밴드 연주를 했어요. 그래서 제가 방학 때 서울 남대문 그랜드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었지요.” 어느 날 작곡가 이봉조가 클럽에 찾아왔다. 작은아버지 친구인 이봉조는 미 8군 무대서 색소폰을 불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이봉조는 정훈희 노래가 끝나자 무대로 달려와 팝송을 불러보라고 했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제가 ‘문 리버(Moon River)’, 가수 패티 페이지 노래 ‘아이 웬트 투 유어 웨딩(I Went to Your Wedding·당신의 결혼식에 갔었어요)’을 불렀어요.” 노래를 듣고 이봉조가 말했다. “쬐깐한 게 참 노래 잘하네. 영어 발음도 좋고. 니 노래 어디서 배웠노?” 미 8군에서 음악하는 집안의 딸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미군 부대서 군 생활을 한 큰오빠(정희택)는 1970년대 록밴드 히식스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로 활약했다. 이봉조가 작곡한 노래 ‘안개’로 가요계에 데뷔한 정훈희도 미군 무대에 여러 차례 섰다. 정작 첫 미군 무대에 선 때는 시기가 좀 늦었다. 데뷔 후 10년쯤 지난 1977년 군산 미 공군 부대 특설 무대에 초청받았다. 1960년대를 풍미한 백인 듀엣 라이처스 브러더스의 노래 ‘언체인드 멜로디(Unchained Melody)’를 불렀다. “Oh my love, my darling (오 내 사랑, 그대여) I’ve hungered for your touch(당신의 손길이 너무도 그리워요) A long lonely time(길고도 외로운 시간들).” 노래가 끝났는데 일순 침묵이 흘렀다. 이런 무반응은 처음이었다. 혹시 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마이크를 잡은 두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제가 무대에서 긴장 같은 건 잘 안 하거든요. 세계 가요제 무대에도 섰고, 서울 대형 나이트 클럽에서 미군들 앞에서도 노래 많이 했거든. 차라리 야유가 터지면 다행인데 그조차도 없이 조용하니까, 내가 일냈구나 생각했지요.” 그 순간이었다. 조용하던 관객들이 노래가 완전히 끝났다는 걸 확인했는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튿날 미 8군 신문에 정훈희 기사가 크게 실렸다. 미 8군 무대에서 만났던 선배들도 기억한다. “미 8군 쇼 무대에 섰던 가수 오빠들이나 언니들을 보면 정말 치열하게 살았어요. 요즘 TV에서 아이돌 데뷔 오디션 하지요? 그때도 오디션이 있어서 A, B, C 같은 등급을 매겼어요. 돌아가신 현미 언니를 비롯해, (윤)복희 언니, (윤)항기 오빠, (장)미화 언니 같은 사람들은 정말 인기 스타였어요.” [연예팀ieconomyseou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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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희 “미8군 데뷔 무대서 난생 첫 기립박수… 노래 인생 ‘꽃밭’ 열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