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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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데뷔 53년 만에 첫 TV 드라마 출연에 도전하며 스포츠동아와 인터뷰를 했던 배우 남궁원 씨. 당시 그는 “드라마 출연 여부를 놓고 가족회의를 세 번 열 정도로 고민이 컸다”라면서도 “훗날 ‘저 사람 참 멋있다’란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동아일보캡처

 

유학 꿈꾸던 공대생이 배우로

조각 같은 외모에 연기력 겸비

예명 ‘남궁원’ 신상옥이 작명

‘임금보다 머슴 역 원했다”


[이코노미서울=연예팀]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며 곧 유학을 떠날 1934년생 남궁원(본명 홍경일)은 친구 아버지가 사장인 아세아영화사가 제작하는 영화 ‘그 밤이 다시 오면’(1958)에 시골 교사로 출연한다.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 병원비 때문이었다. 영화가 개봉하자 충무로에서는 ‘한국의 그레고리 펙’이 나왔다고 떠들썩했다. 못살고 못 먹던 전후 시대, 180㎝ 키에 남성적 이목구비는 그 자체로 화제였다.

 

한국 영화계의 ‘신사 배우’ 남궁원이 5일 오후 4시 서울아산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90세. 폐암 투병을 한 적이 있다. 경기 양평에서 태어나 6·25 때는 인민군을 피해 마룻바닥 아래 숨어 지내는 등 전쟁 속에서 살아남았다.

 

영화계 데뷔 후 김진규, 최무룡을 잇는 미남 배우로 꼽혔고, 이후 300여 편 영화에 출연했다. 신상옥, 이두용 같은 대중 영화 감독은 물론 이만희, 김기영, 하길종 같은 예술성 강한 영화감독도 그를 사랑했다. 외모에 의존하는 배역 대신 강한 캐릭터에 끌리는, 천생 배우였다.

 

1959년 신상옥 감독의 ‘자매의 화원’에 청년 화가로, 1960년에는 김승호, 주증녀, 최은희, 김진규, 도금봉, 신성일, 엄앵란 등 당대 최고 배우들이 모두 출연한 ‘로맨스 빠빠’에 대학생 아들로 출연한다. ‘빨간 마후라’에는 전사한 전투기 조종사로 ‘사진 출연’했지만 존재감이 작지 않았다. 임화수가 제작하고 신상옥이 연출한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도 그의 출연작. 김진규가 이승만, 남궁원이 주시경 역할로 나온다.

 

1960년대는 신성일, 최무룡 같은 ‘반항적 미남’을 위한 영화의 시대였다. 반듯하고 심지어 귀족적인 풍모의 남궁원에게는 자리가 많지 않았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임금보다는 머슴, 007보다는 빨갱이 역을 맡고 싶었다.”

 

007 시리즈의 세계적 히트에 자극받아 충무로가 기획한 액션물에 호출된다. 1966년 ‘간첩작전’ ‘국제금괴사건’, 1967년 ‘남남서로 직행하라’ 등이었다. 비록 당시 정보부의 반대로 ‘빨갱이’ 대신 ‘첩보원’ 역할이었지만, 새로운 캐릭터를 연구하고 도전했다. 1967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풍운의 검객’에서는 일본 영화 ‘요짐보’처럼 떠돌이 검객으로 나왔다. 그는 데뷔 전 연기 수업을 받지 않은 것을 마음에 걸려 하면서 촬영 현장에서도 ‘연기 수첩’에 메모를 하며 늘 공부했다고 한다.

 

신상옥 감독과 다시 만난 1968년 ‘내시’에서는 강한 욕망을 가진 왕 명종으로 나왔고, 이두용 감독의 1986년 리메이크작 ‘내시’에서는 강렬한 성격의 내시감 역을 맡아 열연했다.

 

1969년 ‘암살자’는 이만희 감독의 작품으로 남궁원은 여기서 신탁통치 반대로 돌아선 탈공산주의 정치인 암살을 사주하고, 암살자마저 죽이는 잔혹한 공산당 하수인 역할을 맡았다. 허장강, 신성일 등과 함께 악역으로 출연한 ‘여섯 개의 그림자’에서 전처를 괴롭히는 악당으로, 일제시대 만주를 배경으로 한 ‘쇠사슬을 끊어라’(1971)에서도 그의 연기 변신은 계속됐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와 ‘충녀’(1972)에서는 자본주의 질서에서 변태가 되는 부르주아 중년 남성을, 하길종 감독의 ‘화분’(1972)에서는 질투에 사로잡혀 파멸하는 동성애자를 연기했다.

 

그를 특히 아낀 신상옥 감독은 ‘멀리 남쪽에 있는 궁전(南宮遠)’처럼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며 예명을 지어주고, 홍콩에 데려가 영화 감각을 익히게 했다. 신상옥이 그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남궁원은 서양 미남 배우와 겨뤄 빠질 게 없는, 국제 감각을 갖춘 유일한 한국 배우다” “너는 지금 나온 게 참 안됐다. 한 10년, 15년 뒤에만 나왔어도….”

 

그의 필모그래피(출연작) 중 1980년대 목록에는 상업적 멜로물이 적잖다. 1981년 정비석 소설을 영화화한 ‘자유부인’ 등이 그렇다. 그 이유를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 밝힌 적이 있다. “1980년대 그런 영화를 많이 촬영하게 된 것은 아이들 학비 때문이었다.” 홍정욱 전 의원(올가니카 회장), 성아, 나리 등 세 자녀는 하버드, 컬럼비아, 스탠퍼드 등 명문 대학을 졸업했다.

 

아버지의 책무를 위해 출연작의 완결성을 양보한 것이다. ‘한국의 그레고리 펙’은 식구를 먼저 생각하는 한국의 수많은 아버지 중 하나였다. 영화 촬영 중 입은 부상 치료차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온 스튜어디스 출신 부인 양춘자씨다. 평생 그의 곁을 지키며, 1남 2녀를 훌륭히 키워냈다.

 

고인은 최근 수년간 폐암 투병을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영화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른다. 유족으로는 아내 양춘자 씨와 아들 정욱 올가니카 회장, 딸 나리 성아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8일 오전 9시 반. 02-3010-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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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옥도 극찬한 한국의 ‘그레고리 펙’…배우 남궁원씨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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